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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독립군 정리education 2017. 5. 21. 10:21728x90
1920년대 독립군 정리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항일 운동의 방식은 비폭력에서 무장 투쟁으로 변화합니다.
간도에서는 북간도의 국민회군, 대한 독립군, 북로 군정서군, 군무 도독부군 등과 / 서간도의 서로 군정서군, 대한 독립단,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총영 등이 활동합니다.
연해주(신민단, 경비대, 자유대대, 사할린 부대, 형성단)와 미주(국민 군단, 비행사 양성소, 소년병 학교)에서도 독립군이 조직됩니다.
1920년에는 중요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있었습니다.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군 부대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드는 활발한 국내 진입 작전을 수행합니다.
독립군이 일본 헌병 순찰대를 공격하고 이에 격분한 일본군은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지만 삼둔자에 매복을 한 독립군에 큰 타격을 입고 맙니다.
일본군은 재정비 후 봉오동을 기습 공격하지만 독립군에 크게 패배합니다. 이것을 봉오동 전투라고 합니다.
1920년 10월, 봉오동 전투의 대패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만주에 진입하려 하였으나 중국이 거부합니다. 이에 출병을 위한 구실로 훈춘 사건을 조작합니다.
훈춘 사건(1920. 10)은 일본이 중국 마적과 내통하여 훈춘을 공격하도록 합니다. 이를 구실로 일본군은 3개의 사단을 출동시켜 조선인을 무자비하게 총살하고 불태웁니다. 3개월간 희생된 조선인의 수는 3만여 명에 이릅니다.
훈춘 사건으로 중국에 진입한 일본군의 공세에 독립군 부대들은 백두산 지역으로 후퇴하다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군과 연합하여 반격, 대승을 거둡니다. 이것을 청산리 전투라고 합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일본은 독립군의 근거지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학살, 강간하고 가옥과 학교, 교회를 방화합니다.
1920년 10월에 일어난 이 사건을 간도 참변, 경신참변이라고도 하며, 그 결과로 간도 지역의 한인 사회가 초토화되고 대부분의 무장 단체나 독립군은 와해되거나 러시아로 피신합니다.
일본의 독립군 대토벌 작전을 피하여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서로 군정서 등은 대한 독립 군단으로 통합하고 소련 영토 내로 이동합니다.
당시 소련에서는 적색군과 백색군의 내전이 있었는데 적색군은 약소국을 지원하겠다고 하고, 이에 우리 독립군은 자유시(스보보드니, Svobodnyi)로 이동하여 소련 내전에 참전하게 되지만, 내전에 승리한 적색군은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해 한인 부대에 무장 해제를 요구합니다.
지휘권 양도를 거부한 한인 독립군은 충돌과정에서 무수한 희생을 당하고(자유시 참변, 1921) 이것으로 우리 독립군 세력은 와해됩니다.
이후 임시 정부 산하의 조직으로 압록강 연안 지역을 관할하는 참의부(1923), 남만주 일대를 관할한 정의부(1924), 소련에서 돌아온 독립군을 중심으로 북만주 일대에서 활동한 신민부(1925)의 3부가 성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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