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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과 통상 수교 거부 정책education 2017. 3. 21. 22:43728x90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과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우리나라 근대 사회의 전개는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가 시작되는 19세기 후반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국내 정세는 세도 정치 시기입니다. 당시 왕실 외척이 정권을 장악하여 매관매직이 성행했던 시기입니다.
왕권이 약화되고 통치 질서가 무너집니다. 삼정의 문란으로 위기에 몰린 농민들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를 합니다. 여기에 이양선의 잦은 출몰, 천주교의 확산, 각종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조선 사회의 불안감과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습니다.
국외 정세 또한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강대국들은 후진국을 침략해 식민지화하였습니다. 이것은 독점적 자본주의와 배타적, 침략적 민족주의, 사회 진화론이 혼합된 제국주의의 출현때문입니다.
이 시기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고종의 아버지 이하응 흥선 대원군(1863~1873)이 실권을 장악하고 개혁 정책을 폅니다. 크게 왕권 강화책, 경복궁 중건 사업, 서원 철폐, 민생 안정책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왕권 강화책 입니다. 흥선 대원군은 세도 정치의 중심에 있는 안동 김씨를 축출하고 파벌과 가문을 배제한 능력에 따른 인재를 등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국정 전반을 담당하는 막강한 권을 가지고 있는 비변사를 축소, 폐지합니다. 대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시켜 정치와 군사를 분리시킵니다. 또한 국가의 통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나라의 법전을 정리하여 대전회통과 6조의 역할에 관한 규칙인 육전조례를 편찬하게됩니다.
두 번째, 흥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임진왜란 중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 사업을 실시합니다. 의도는 좋으나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경복궁 중건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하게 됩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스스로 원하여 납부하는 돈을 의미하는 원납전을 통하여 강제로 기부금을 징수합니다. 그리고 공사비 마련을 위해 당백전을 발행하여 화폐 가치가 하락하고 물가는 상승합니다. 결과적으로 근정전, 경회루 등이 중건되어 궁궐의 모습은 갖추어졌으나, 양반과 백성들로 원성을 사게 됩니다.
세 번째, 서원 철폐입니다. 이 시기에 서원은 지방 양반들의 거점으로 그동안 백성을 수탈해 온 본거지였습니다. 흥선 대원군은 이를 철폐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하였습니다. 또한 만동묘 철폐도 꼭 알아야 할 사건입니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과 병나라 황제 의종의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서원이 가지고 있던 많은 토지와 노비가 국가에 귀속되어 재정에 도움이 되었고 수탈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원 철폐가 유생들의 큰 반발로 훗날 흥선 대원군이 퇴진하게 되는 배경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민생 안정과 국가 재정의 확충의 목적으로 시행한 민생 안정책이 있습니다. 불법적 토지 겸병을 금지하고, 세금을 피하기 위해 등록하지 않은 토지라는 뜻의 은결을 색출하기 위해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합니다. 그 외에도 호포법과 사창제를 실시합니다. 이러한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은 왕권을 강화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전통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 민생을 안정시켰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제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전통 체제 내의 개혁으로 인해 양반층과 농민층의 저항을 받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개혁 정책과 더불어 중요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있습니다. 19세기 무렵부터 서양 열강의 이양선이 나타나 해안 측량과 통상을 요구하게 되고 철종 때부터 프랑스 선교사가 국내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신자가 점차 늘어납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가 베이징을 점령하고 러시아가 연해주를 획득하면서 서양 열강에 대한 위기의식과 사회적 불안이 극심하게 확산됩니다. 이에 흥선 대원군은 외세의 침투를 막기 위해 열강들의 통상 수교 요구를 거부하는 정책을 강력히 시행합니다. 이를 위해 무기를 개량하고 포대를 설치하여 해안 경비를 강화하는 등 군사력을 확충합니다.
병인박해(1866.1)입니다. 원래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에 관대하였으나 프랑스 선교를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던 일이 실패하고, 청에서 천주교를 탄압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거기에다 유생들의 끊임없는 천주교 탄압 요구 때문에 결국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수천 명의 신자들을 처형하고 맙니다. 1866년 1월에 일어난 병인박해입니다.
이 소식이 프랑스에 전해지자 프랑스는 이것을 구실로 삼아 조선과의 통상 수교를 요구합니다.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3척의 군함으로 서울 양화진까지 수로를 탐사하고 돌아갑니다. 이후 조선은 침략에 대한 방어태세를 갖춥니다. 프랑스 로즈 제독은 7척의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을 침략합니다. 강화도를 점령하고 한성으로 진입을 시도했으나 , 문수산성의 한성근, 정족산성의 양헌수 부대가 이를 격퇴합니다. 이것이 1866년 9월에 일어난 병인양요입니다. 병인양요의 결과로 강화도 외규장각에 있는 각종 서적과 문화재를 약탈당하게 되고, 이에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과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합니다.
1868년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조선에 대한 통상을 거부당하자 충남 덕산에 있는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하는 이른바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 일어납니다. 결국 주민들의 저항으로 도굴은 실패하고 쫓겨나고 맙니다. 그 결과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의지가 더욱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양에 대한 배척 의식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미양요(1871)입니다. 신미양요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게 됩니다.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통해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관리를 살해하고 인가를 약탈했습니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와 평양 주민들의 공격으로 제너럴셔먼호는 침몰합니다. 이 사건에 대한 책임 추궁과 통상 수교의 목적으로 미국 로저스 제독의 콜로라도호가 강화도로 침입하여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를 공격합니다.
여기에 어재연이 이끄는 수비대가 광성보와 갑곶진 등에서 맞써 싸우고 미국은 어재연 장군기인 수자기등의 수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퇴각합니다. 이 사건이 1871년 신미양요입니다. 이러한 여러 서양의 침략에 대한 결과로 흥선 대원군은 척화의 의지를 표명하고 민심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하여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건립하게 됩니다. 일시적으로나마 열강의 침략을 저지한 반외세적 자주 운동이기는 했지만 급변하는 19세기 후반의 세계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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