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education 2017. 3. 28. 16:38
    728x90

    동학 농민 운동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일단 동학이란 무엇인지 알아야겠습니다. 동학은 1860년에 경주의 몰락 양반인 최제우가 창시하여 인내천, 후천개벽 등의 평등 사상, 사회 변혁 사상을 그 교리와 이념으로 삼고 있는 종교입니다.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는 1864년에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을 당합니다. 그 후 동학은 2대 교조 최시형 등의 노력으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교세가 확산됩니다. 


     동학이 확산하는 데에는 농민층의 동요가 큰 원인이 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로 민씨 정권의 부정부패와 근대 문물 수용을 위한 과다 지출로 국가 재정이 악화됩니다. 둘 째 재정 확충을 위한 정부의 조세 수취 강화와 더불어 관리의 수탈과 횡령이 심화되었습니다. 셋 째, 일본의 경제 침탈이 강화되었고 그럼으로써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반봉건, 반외세 의식이 강화되고 사회 변혁의 욕구가 증가하면서 농민들의 봉기가 자주 발생하게 됩니다.


     동학 농민 운동은 크게 1894년 1월 고부 민란, 1894년 3월에서 5월까지 일어난 제1차 농민 봉기, 1894년 9월에 일어난 제2차 농민 봉기로 나뉩니다. 고부 민란에 대해 알아보면 고부 군수 조병갑이 수세를 강제 징수하고 백성들을 동원하여 만석보를 다시 쌓게 합니다. 이에 백성들이 폐정의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실패하고 동학의 접주인 전봉준은 사발통문을 돌리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군수 조병갑을 쫓아내고 관리들을 처벌합니다. 이 고부 민란 사건으로 정부는 조병갑을 파면하고 박원명을 신임 군수로 임명하게 되고 농민들은 자진 해산합니다.



     고부 민란을 조사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민란의 주동자와 참가자를 색출하여 처벌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합니다. 이에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은 창의문을 발표하고 각 지역에 통문을 돌려 보국안민과 제푹구민을 위해 봉기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합니다. 이것이 반봉건 투쟁의 제1차 농민 봉기입니다.


     전봉준은 백산 집회에서 격문과 4대 강령(1.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 것,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할 것, 3.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깨끗하게 할 것, 4. 군대를 이끌고 서울 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앨 것)을 선언하고, 농민군 지휘부를 백산에 설치합니다. 동학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합니다. 농민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청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한편으로는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수용합니다. 이것이 전주 화약입니다. 전주 화약의 결과 농민군은 자진 해산하고 지주제 혁파, 본건적 신분제를 타파하자는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실시하고자 최초의 농민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합니다. 


     전주 화약을 맺으면서 정부가 청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는데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군도 톈진 조약을 구실로 제물포에 상륙합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기습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아산만에 정박 중인 청나라 군함을 격퇴합니다. 이로써 청일 전쟁이 시작됩니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시모노세키조약(1895년4월)을 통해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부정당하고,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 2억 냥의 배상금도 지불하게 됩니다. 조선을 독점한 일본은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고 내정 간섭을 위해 개혁을 강요합니다. 



     일본의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1894년 9월 제2차 농민 봉기가 일어납니다. 제2차 농민 봉기는 항일 구국 투쟁이자 반외세 투쟁이며 남접만 참가한 제1차 농민 봉기와는 달리 남접과 북접이 모두 참가하는 특징을 가집니다. 삼례에서 농민군이 재봉기하고, 논산에서 전봉준의 남접과 손병희의 북접이 연합하고, 공주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우금치 전투를 치르지만 패배하고 맙니다. 우금치 전투를 마지막으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지도부와 수많은 농민군들이 체포되고 처형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동학 농민 운동은 신분 차별 철폐, 토지의 평균 분작 등 전통적인 지배 체제의 모순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자주적으로 물리치고자 한 반봉건, 반침략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의 반봉건적 성격은 갑오개혁에 일부 반영되어 성리학 중심의 전통 질서의 붕괴를 촉진하였고, 반침략적 성격은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들이 영학당, 활빈당을 조직하는 등의 의병 운동에 가담하는 항일 무장 투쟁의 활성화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은 구체적인 근대 건설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농민층 이외에는 지지 기반 확보에 미흡하였으며,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비해 군사적 역량이 부족했다는 한계를 가집니다.


    고부 민란(1894.1) - 제1차 농민 봉기(1894.3) - 황토현, 황룡촌 전투, 전주성 점령(1894.4) - 청군과 일본군 출병(1894.5) - 전주 화약 체결(1894.5.7) - 청.일 전쟁(1894.6.23) - 제2차 농민 봉기(1894.9) - 우금치 전투(1894.11)

    300x250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