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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education 2017. 4. 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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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임오군란(1882)이 발생에는 4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먼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인데 개화를 추진하는 민씨 정권에 반발한 척사파가 고종의 이복형이자 서자인 이재선을 왕위에 올리고 흥선 대원군을 복위시켜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민씨 정권과 대원군의 대립,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이 심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식 군인들은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 5군영을 2군영으로 축소함에 따른 실직, 급료 체불 등으로 불만이 높아진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실직이나 임금 체불로 생활이 어려워진 구식 군인들 중 상당수는 난전에서 상행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부가 국가 재정 확충을 위해서 특권 상인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치고 난전을 단속하면서 군인들의 생활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경제 침투가 있습니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 등으로 조선에 대한 경제 침투를 가속화하였습니다. 특히 대량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면서 쌀값이 폭등하자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들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구식 군인들의 봉기가 발생합니다. 구식 군인들은 대원군에게 도움을 청하고 선혜청의 창고를 습격하였습니다. 또한 구식 군인들은 별기운의 일본인 교관을 살해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습니다. 여기에 도시 하층민도 봉기에 합세하여 민씨 정권의 고관들을 살해하고 궁궐을 습격하였습니다. 이에 민비는 충주로 피신을 합니다. 군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재집권하게 된 대원군은 정부의 개화 정책을 중단하고 5군영을 부활시켰고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폐지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과 청이 개입을 합니다. 일본은 조선 내의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조선 출병을 준비하고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조선에 출병한 청의 군사는 군란을 진압하여 일본의 무력 개입 구실을 차단하였고 대원군을 군란 책임자로 지목하여 청으로 압송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민씨 세력이 재집권하면서 친청 정책이 실시되었습니다.


    임오군란의 결과로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 공사관의 경비 병력 주둔을 허용하여 일본 군대가 조선 내에 공식적으로 주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물포 조약(1882)입니다. 그리고 조일수호조규 속약의 체결로 일본 상인의 활동 범위를 확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요구로 대원군 때 전국에 세워진 척화비를 철거합니다.

     한편 청의 내정 간섭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내정 고문 마젠창과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를 파견하여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청은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군대를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친군영을 설치하여 조선의 군사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상인의 내지 통행권을 보장하였고 조선을 속방으로 규정하여 청의 종주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친청 정책으로 조선의 자주적인 개화 정책은 후퇴하게 됩니다.


     다음은 갑신정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박영효가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되면서 급진 개화파의 활동이 본격화되었고 김옥균, 서광범 등 개화당 요인들이 고종의 신임을 받아 개화 정책을 추진한 것이 계기가 됩니다. 청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 내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내정 간섭을 강화하였는데 이에 친청 정책을 전개하던 민씨 정권의 횡포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급진 개화파인 개화당을 탄압하여 개화 정책은 후퇴하였습니다.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차관을 끌어들여 개화 정책의 자금으로 사용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자 그 입지가 위축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와 프랑스의 전쟁 발발로 조선에 주둔하던 청군의 일부가 철수하였고 일본의 공사가 개화당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개화당은 우정국의 개국을 축하는 축하연에서 정변을 단행합니다. 그리하여 민씨 정권의 고관을 살해하고 고종과 민비를 창덕궁에서 경우궁으로 이동시킵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개화당 정부를 수립하고 14개조 혁신 정강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청군의 개입으로 인해 정변은 3일 만에 진압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군이 청군에 패퇴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홍영식은 피살되고 박영효,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 망명을 합니다. 이렇게 급진 개화파가 몰락함으로써 상당 기간 개화 운동은 단절되었습니다. 청은 고종을 견제하고자 흥선 대원군을 복귀시키고 위안스카이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대한 간섭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 공사관의 신축 비용을 부담한다는 내용의 한성 조약(1884)을 체결합니다.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양국군의 공동 철수와 조선 파병 시 상대방 국가에 미리 알린다는 내용의 톈진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일본은 청과 동등하게 조선 파병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갑신정변은 정치적으로 청에 대한 사대 관계를 청산하고 자주 독립 국가 건설과 입헌 군주제를 지향하였고 사회적으로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확립하고자 하여 봉건적 신분제를 타파하고 근대적인 평등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로 이것은 근대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최초의 정치 개혁으로 독립 협회와 애국 계몽 운동으로 이어지는 근대화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청은 갑신정변을 수습하고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과 경제 침탈을 강화하였습니다. 청 상인은 월등한 금융 자원과 정치적 후원을 토대로 조선 내의 상권에 있어서 일본 상인을 능가하였습니다. 조선은 청의 지나친 간섭에 불만을 품었고 이에 남하 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와 비밀 협약을 맺으로고 하였으나 청의 방해로 실패하였습니다.

     일본은 조선 내의 정치적 주도권을 잃게 되자 조선에서의 경제적 침탈에 집중하였습니다. 일본 상인들은 금융 지원을 받으며 직접 농촌에 침투해 고리대의 방법으로 곡물을 사들이면서 수익을 창출하였습니다. 이에 조선은 미곡 유출을 중단시키는 방곡령을 실시하였으나 일본의 항의로 중지되고 오히려 배상금만 지불하였습니다. 조 일 통상 장정에 따르면 방곡령 시행 1개월 전에 통지를 해야 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았다고 하여 일본이 오히려 배상을 요구한 것입니다.


     박은식의 한국통사에서 갑신정변의 한계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개화당의 실패는 우리에게 매우 애석한 일이다. 조선 일류 수재들이 일본인에게 이용당해 그처럼 크나큰 착오를 저질렀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어찌 일본인이 진심으로 김옥균을 성공하게 하고 성의 있게 조선의 운명을 위해 노력하겠는가? 우리가 만일 발전의 형세를 보이면 그들이 백방으로 방해할 터인데, 어찌 원조하겠는가? 그 당시 일본은 계속 청나라의 우세에 억압되어 이를 배격 능가하려고 온갖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우리의 청년 수재들이 일본의 신풍조에 물들어 청나라의 예속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이 이를 이용하여 청으로부터 독립을 권하고 원조까지 약속했지만, 사실은 조선과 청의 악감정을 도발하여 그 속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속셈이었다.’ 갑신정변의 직접적인 실패 원인은 청나라 군대의 간섭 때문이었으나 그 밖에 정변이 민중에게 뿌리내리지 못하였고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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